기억술의 역사
고대에는 기억력이 절대적이었다. 당시는 필기도구가 없으므로 오직 기억에만 의존하였기 때문이다. 그 후 필기도구가 생기게 되었지만 지식이나 지혜는 역시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BC 6세기 후반의 고대 사회는 페르시아 제국이 약 2세기 동안 중앙아시아에서 이집트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야심에 찬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왕은 그리스 땅까지 넘보기 시작하였다. 이에 불을 붙인 것이 그리스의 식민도시 밀레투스다. 페르시아의 영향권 속에서 경제적 번영을 누리던 밀레투스는 아테네의 사주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걸 보고 다리우스 왕은 즉각 반란을 진압한 다음 배후를 조종한 그리스 정벌에 나섰다. 이것이 고대의 유명한 페르시아 전쟁이다.
그리스의 여러 도시 국가들은 페르시아의 침략에 대한 대처를 어떻게 할 것인가의 노선을 둘러싼 대립으로 날마다 격론이 벌어졌다. 아테네는 항복보다는 결국 전쟁을 택하였으며 물밀 듯 쳐들어오는 페르시아의 대군을 마라톤 전투에서 물리쳤다. 이 전쟁의 승리로 아테네는 이날을 기념하여 축제를 벌이고, 마라톤 경기는 여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페르시아 전쟁은 시작에 불과했다. 다리우스의 뒤를 이은 크세르크세스는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이제 페르시아 전쟁은 그리스 전체에 <자유를 위한 싸움>으로 이해되었고 민족의 생존과 역사 발전으로 이어졌다. 그리스는 전쟁의 승리를 위해 국민 총동원령을 내리고 누구나 공을 세우면 출세를 보장하는 제도를 마련하였다.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 대군의 침입으로 아테네는 철저히 파괴되었지만 살라메스 해전의 승리로 10여 년에 걸친 전쟁은 끝이 난다.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로 아테네는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고 제도에 따라 누구나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되면서 출세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때부터 웅변을 잘하는 변론술이 득세하기 시작하고 변론에 필요한 기억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BC 5세기 경의 이탈리아에서는 시칠리 섬의 시라쿠사시가 각지에 식민도시를 갖고 있을 정도로 발전하였다. 민주 정치의 실시로 이탈리아 본토에까지 진출하여 많은 도시를 지배하였다.
이에 따라 소유권을 둘러싼 소송이 무수히 많아졌다. 말을 잘하는 사람이 이기에 되고 법정 변론이 부의 척도가 되면서 법정 변론을 가르치는 사람이 생겨났는데, 코락스나 테이시아스 같은 사람은 당시 유명한 웅변 스승이었다. 이것을 웅변의 시초로 보는 사람이 있다.
변론술의 학습에는 본보기가 되는 언변을 열심히 외우는 암기가 주류였으므로 여기서 기억술이 필요하게 되었다. 변론가들이 긴 연설을 할 때 마음먹은 것과 다르지 않게 열변을 토하려면 당연히 기억술의 뒷받침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초기 기억술은 변론술의 한 방편으로 시작되었다. 기억술이란 기억한 내용을 필요한 때에 꺼내어 보다 신속하고 용이하게 이용하려는 기술을 말한다. 이 시대에 히피아스와 시모니데스가 가르쳤다고 하는 <그리스인의 변론술> 은 유명하다.
시모니데스는 BC 556 - 468 고대 그리스의 서정시인이자 웅변가다. '기억법은 웅변가의 본디부터 가진 교양을 나타내는 본질적인 부분이다.'라고 말한 시모니데스는 기억법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시모니데스는 심상을 이용한 기억법을 고안하여 당시의 웅변가와 사상가들에게 보급하고 활용토록 하였다.
에게해의 키오스 섬에서 출생한 시모니데스는 젊은 시절부터 시적 재능이 알려져 그리스 각지의 통치가나 귀족에게 곧잘 초청되었다. 페르시아 전쟁 때는 아테네로 돌아가 마라톤 싸움 등 전사자를 찬양하는 노래를 지었으며 아나크레온과 함께 아테네 궁정에 초대되어 합창 대회 경연에서 여러 번 우승하여 명성을 높였다.
데사리아의 귀족 스코파다르 집에 머물면서 당시 유행인 전차 경주에서의 승리를 찬양하기도 하였다. 페르시아 전쟁 때의 전사자의 묘비명으로 유명한데 특히 테르모필레를 지키다가 전사한 스파르타 장병을 노래한 비명은 유명하다. 그의 시는 다방면에 걸쳐 우아한 어휘와 간결한 시구 속에 작자의 견식과 진실 된 점이 샘처럼 솟아나는 뛰어난 점으로 많은 사람의 찬탄의 표적이 되었다.
시모니데스가 귀족의 화려한 파티에 참석할 때였다.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강풍이 휘몰아쳐 집이 무너지면서 순식간에 집안에 있는 사람들이 깔려 죽었다. 커다란 대리석 돌 더미에 깔린 시체는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런데 비상한 기억력을 가진 시모니데스는 파티의 참가자들이 앉았던 자리를 기억해내어 시체의 주인을 찾아냈다. 이것은 한 장의 파티 풍경을 이미지 그림으로 기억 속에 간직한 것이었다.
시모니데스의 이러한 이미지(심상)을 이용한 기억술은 화제가 되면서 학문으로 다뤄지게 된 것이다. <서사시는 이야기하는 그림이다.>라는 시모니데스의 말은 심상 기억술의 핵심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 심상법을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억과 회생>에 관한 연구를 통해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당시의 웅변가들은 이같은 기억술을 신이 자기에게 내린 선물로 간주하여 소중하게 여길 정도였다. 시모니데스가 훈련된 기억법의 고안자라고 하면 시세로는 초기의 위대한 교사라고 하겠다. 시세로는 기억법의 도움을 <웅변가론>이라는 저서에서 "당시의 법률가나 웅변가들이 기억법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하면서 그 자신도 어떻게 이 기억법을 활용하고 있는가를 밝혔었다.
변론술은 법정용, 의회용, 웅변용의 3분야로 활발하게 전개되고 유행되면서 이것을 가르치는 지혜의 스승이라는 소피스트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었는데 이러한 존경이 나중에는 말만 앞세우는 궤변론자들로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플라톤은 소피스트들의 변론술이 진실이 아니라 진실인 것처럼 가장한 것이라고 비판을 하였다.
기원전 400년경에 쓰여 진 여러 문헌에는 <위대하고 멋진 발명은 기억력이다. 학습에도 생활에도 항상 도움이 된다.> 는 내용이 있다. 위대한 철학자 플라톤은 당시 기세를 부리는 소피스트들을 향하여 기술로써 자격을 갖추지 않은 채 단순한 경험이나 언변만을 내세운다고 지적하였다.
이런 플라톤의 정신을 이어받은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억력을 익히는 습관은 논증을 보다 솜씨 있게 해준다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변론술>을 집필하였다. 여기서 변론가의 성격 -- 에토스, 청중의 감정 -- 파토스, 웅변의 논리 -- 로고스가 포함되고 관철되어야 올바른 변론술이라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기술로써 완성한 변론술은 내용이 더욱 구체화되어 이를 가르치는 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때의 교육 과정은 <문제의 발견, 논리의 배치, 쟁점에 대한 조사, 증거의 기억>이 강조된 것이었다. 기원전 100년경에는 키케로와 퀸틸리아누스의 노력에 의해 변론에서의 승리를 위한 기억술의 중요성이 강조되며 계속 연구 발전되었다.
기억술 하면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고대 로마의 웅변가이며 철학자인 키케로일 것이다. 그가 쓴 장소의 기억술은 지금도 유명하다. 이 책은 고대 기억술의 대표작으로서 기억술의 고전이 된 책이다. 철학자이기도 한 키케로는 연설문을 기억하는 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매일 산책하는 산책로는 뇌 기억의 창고이다.>
실제로 키케로는 산책하면서 얻은 영감이나 철학적인 사고의 모든 내용을 산책로에 나오는 경치 속에 상상으로 기록하였다. 보통 사람으로는 믿기 어려운 일이다. 키케로는 이와 같은 기억 방법으로 자신이 변론한 장소에 미리 가서 자신의 사상이나 철학을 주변 경치와 연관지어 기억한 다음에 나중에 그 풍경을 보면서 조리있고도 강력한 변론을 한 것이다. 만일 다른 장소로 옮겨 다시 그와 같은 내용으로 웅변을 해도 이미 본 경치를 기억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기에 먼저 변론한 장소를 떠올리면 똑같은 내용으로 변론을 할 수 있었다.
키케로는 이러한 놀라운 기억술의 발휘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위대한 웅변가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최근의 한 실험에서 이 방법을 사용했을 때와 사용하지 않았을 때를 비교해본 결과 무려 그 효과가 7배나 높았다고 한다.
고대 로마의 변론학자인 퀸틸리아누스가 쓴 변론술 교본 12권은 변론가 양성 입문서로 <초등 교육, 수사학, 문체, 연설법, 성격, 교양> 등을 논하고 있다. 특히 이 책의 내용은 기지와 유머, 말의 리듬, 넓은 교양과 높은 덕성을 닦는 훈련을 강조하였다. 퀸틸리아누스는 이렇게 말했다. '웅변술에 의해서 현재의 빛나는 지위를 얻는다는 사실은 모두가 기억력이 큰 역할을 하였다. 이점을 깨닫는다면 훈련된 기억력이 얼마나 위대하고 초인적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기억을 '마음속에 있는 밀랍에 경험이 각인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기억의 반대인 망각에 대해서는 '밀랍에 각인되지 않거나 지워진 것'이라고 말하였다.
기억에 대한 설명을 플라톤은 비둘기장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마음을 비둘기장이라고 생각해 보자. 여러 마리의 새를 잡아서 비둘기장에 넣는 것이 기억이다. 그리고 그 비둘기장에 손을 넣어 새를 손으로 잡고 있는 것이 상기이다.' 플라톤은 밀랍의 비유와 비둘기장의 비유를 통해 과거의 경험이 어떻게 해서 머릿속에 보관되고, 보관된 기억이 상기(회상) 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플라톤이 기억에 대해서 말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억의 법칙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의 철학자로 죽기 전 약 7년 동안 (기원전356∼323)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어렸을 적 가정교사를 한 스승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은 동물에 대한 비유로 이루어졌다. 그가 동물에 몹시 흥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기억의 3 가지 법칙은 다음과 같다. 1. 유사의 법칙 2. 대조의 법칙 3. 근접의 법칙으로 이것은 비슷한 것, 두 쌍 가까이 있는 것은 외우기 쉬워서 기억하기 쉽다는 것이다.
중세에 들어와서 스콜라 철학과 종교적 독선이 유럽 전 지역을 휩쓸면서 <인간의 상상력을 이용하는 기억법>이 종교가들에게는 달갑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그러나 추상적인 종교 이념의 성서를 배우고 기억하는 데는 기억술의 놀라운 효과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중세 이탈리아의 스콜라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바탕을 두고 기억술을 진리에 따라서 보완하려고 했던 사람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가톨릭 세계관에 도입하여 체계화시키는 데 크게 공헌한 신학자이기도 하다.
<심상, 순서, 장소, 명상과 반복>이라는 기억훈련 4법칙을 발달시켰고 이 방법은 다시 성 도미닉 교단의 수도사들에 의해 전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앙과 이성, 신학과 철학의 통일성을 주제로 한 정기 토론집 <진리에 대하여>를 펴냈다.
아퀴나스는 고대의 여러 기억술을 예배와 윤리의 학문이 되도록 힘쓴 수호자라고 할 수 있다. 중세를 통해 기억법은 수도승이나 철학자들이 알고 또 실제에 응용 사용하고 있었다.
기억술의 역사에서 마테오 리치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1552년 이탈리아의 마체라타에서 출생한 리치는 예수회 선교사다. 1571년 예수회에 입회하여 1582년 동양의 마카오에 내항하여 가톨릭 포교를 시작하였다. 중국을 포함한 최초의 세계 지도인 <만국여도>를 그렸는데 이 지도는 1584년 왕만에 의해 출판되었다. 1601년 베이징에 들어가 명나라 신종 황제의 정주 허락을 받고 전도에 힘쓰면서 서양 과학 기술 서적을 번역 저술하였다.
번역서 <기하원본> 근대 삼각법서인 <측량법의> 동심천구설을 소개한 <건곤체의> 그리스도 교의를 설명한 <천주실의> 등의 저술을 하는 데는 당시 서구에 뿌리내린 기억법의 역할이 거둔 성과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조너선 스펜스가 쓴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이란 책을 보면 리치 자신이 창조했던 여러 가지 기억의 이미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기억의 이미지에 따라 리치가 살았던 이탈리아, 인도,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만날 수 있다. 리치는 1577년 이탈리아를 떠나 인도를 거쳐 중국에 들어갔다. 1583년에서부터 1601년까지 거기서 활동하였다.
리치가 중국인에게 가르친 기억술은 <기법>이라고 한다. 먼저 기억의 궁전을 짓는 것이다. 궁전 안 연회실의 네 모퉁이에 대표적인 네 개의 이미지를 세운다. 그것은 한자로 <武·要·利·好>이다.
武자를 대각선 방향으로 나누면 창 과(戈)와 그칠 지(止)가 된다. 武는 창으로 뜻하는 전쟁과 끝나 그침을 뜻하는 평화를 모두 함축한 글자다. 16세기 서양을 가톨릭과 신교의 대립, 이슬람 세력과의 대립으로 전쟁과 학살이 끊이지 않았다. 동양도 일본의 조선 침략인 임진왜란 등 한·중·일 삼국이 대 전란에 휩싸여 평화에 대한 갈망도 클 수밖에 없다.
要자는 위, 아래로 나눌 수 있다. <西女>는 곧 서쪽의 여인이다. 당시 중국 서역에는 이슬람교도가 많이 살고 그리스도 교도와 유태교까지 있었다. 리치는 서양의 3교가 유교, 불교, 도교가 뿌리내린 중국에 이질적인 서양의 종교가 수용되는 사실에 희망을 가졌다. 리치는 이런 중국, 동양의 문화에 심취되어 유학자의 옷을 입고 유학자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책을 쓰기도 했다.
利자는 좌, 우로 나누면 곡식을 뜻하는 벼 화(禾)와 칼을 뜻하는 칼 도(刀)가 된다. 곡식을 수확하는 농부의 이미지는 이윤을 추구하는 경제 행위와 직결된다. 리치는 동서양의 무역을 통해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먹고 살았는가가 종교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점차 재정관리 운용에도 신경을 쓰는 것이다.
好자는 아이를 안은 여자, 곧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를 기억시키는 글자다. 리치 자신은 현실에 살고 있지만 그의 영혼은 성모 신앙에 심취해있었기 때문이다. 리치는 이 네 개의 글자로 연상되는 기억의 이미지에 따라 그가 살고 있는 세상을 한꺼번에 이해하고 되살려 낼 수 있었다.
유럽에서는 14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기억술이 크게 유행하였다. 갖가지 기억술 관련 서적들이 저작되었는데 룰루스와 피터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피터는 이탈리아 북부 도시 라벤나의 출신으로 <불사조>라는 책을 내놓았다. 이 책은 초기의 기억 훈련에 관한 책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 피터의 불사조에 의해 기억법은 일반 사람들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 영국의 헨리3세와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도 기억법을 사용했다. 셰익스피어도 이 기억법을 활용했다고 알려지고 있는데 그의 <지구극장>은 <기억극장>으로 불리어졌다.
이러한 기억에 대한 기술적 탐구는 철학이나 논리학에 결부되어 연구가 거듭되었으며 수학이나 백과사전 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6세기 들어와서 소르본느 대학에 기억법 강좌가 실시되었을 때 담당교수인 라빈헤타는 감각적 학습 내용은 시모니데스와 아퀴나스의 고전적 기억술을 사용하고 지적인 학습 내용은 룰루스의 방법을 사용토록 권장하였다.
중세에 들어와서는 종교적인 독선으로 인간의 상상력이 무시되었지만 이후 인간의 이성에 의해 상상력의 복원이라는 상상력의 재평가와 더불어 기억법의 연구가 이루어졌다. 더욱 기억법은 인간의 상상력을 자연적으로 발휘함과 동시에 학습능력을 크게 향상시킴으로 극적인 발전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1888년도에 철학자로서 기억법의 선생이기도 했던 윌리엄 스톡스의 <기억>이란 책이 출판되었다. 스톡스는 확신하였다. <기억법은 멀지 않아 하나의 확립된 학술로서 널리 인정되게 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단호히 주장한 것이다. 이때부터는 시간적, 공간적인 고전적 기억술에서 더욱 발전되어 추상적, 언어적 기억술의 체계로 들어가게 된다.
근대 후기에 들어와서 기억술은 다시 암흑기로 접어들며 위기를 맞게 된다. 과학의 발달과 산업 혁명으로 물질만능 사회가 이루어지면서 책과 노트가 그리고 필기구가 쏟아져 나왔으며 더욱이 <기억보다 이해>를 중시하는 교육적 풍토가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억술이 20세기 초에는 극장의 쇼 무대에서 오락의 소재로 쓰여 지며 희극배우들이 무대에서 암기의 재주를 부리는 <멘탈 트릭>을 하는 데 사용되기도 하였다. 오늘날 텔레비전에서 기억의 천재들이 출연하여 놀라운 그들의 재주를 시청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사례의 전형인 것이다.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한 기억술은 이처럼 가볍게 어떤 목적에 사용되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 기억은 인간의 본질을 규명하는 중요한 명제로써 철학자들의 끊임없는 화두가 되어 정신의 한 숙제로 자리 잡아 연구 발전을 거듭하였다.
17세기 로크와 버클리는 영국의 대표적인 철학자들이다. 로크(1632∼1704)는 경험론적 인식론의 창시자로 <인간 오성론>이라는 책을 써냈다. 로크는 우리가 갖는 관념 상호간의 <일치, 불일치, 결합, 배반 작용>을 지각하는 것이 인식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결과를 지식이라고 하여 관념이 서로 정당하게 결합하거나 혹은 분리하는 것을 진리라고 하였다.
영국 고전 경험론을 대표하는 철학자 버클리는 <존재하는 것은 지각하는 것이다.>라는 근본 명제에 매달렸다. 지각된 관념을 인식의 유일한 대상으로 보고 관념을 지각하는 정신만을 유일한 실체로 인식하였다. 버클리는 1707년에 쓴 <시각신론>에서 시각과 촉각의 구별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다음에 쓴 <인지원리론>에서는 지각되지 않는 추상관념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지각관념만이 존재한다고 보아 지각되지 않는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이러한 사상의 로크와 버클리의 지지자들은 기억이란 연합 관계를 짓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기억은 연합 고리에 의해 확장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동물원에서 낙타를 보았다면 낙타에 의해 아랍이라는 지역과 사막이 생각나고 석유의 이미지가 떠오르며, 그 다음은 석유로 생각나는 주유소가 연상되는 식이다.
독일의 심리학자 어빙하우스(1850∼1909)는 어떻게 해서 연합이 성립되고 이용되는 가를 알기위해 직접 무의미한 낱말을 만들어 암기한 다음에 기억에 대하여 실험을 해 보았다. 어빙하우스는 베를린 대학 재직 중에 자기 자신을 실험 대상으로 삼고 기억의 개량적 연구를 실시하여 그 결과를 1885년 <기억에 대하여>라는 책으로 세상에 내 놓았다.
20세기에 와서 돈 다이크와 그의 지지자들은 기억의 연합 개념을 자극과 반응이라는 2개의 대비 단위로 확장시켰다. 한 철자는 다음에 오는 철자에 대한 자극이 되고 동시에 이전 철자에 대한 반응의 결과라는 주장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근래 들어 기억에 대한 연구를 하는 학자들은 더 이상 연합주의에 동감하지 않는다. 기억에 대한 연구 방법이나 분석에 대한 노력은 인정하나 그 이론이 인간의 기억에 대한 일반적 이론으로 성립시킬 수 있다고 믿지는 않는 것이다.
기억에 대한 연구는 철학적인 관점에서 심리학 분야로 넘어오며 더 적극적인 연구가 실시되었다. 심리학은 우리들 생활의 거의 모든 측면을 취급한다. 사회가 더욱 복잡해짐에 따라 심리학은 인간 문제 해결에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심리학자들의 관심은 <사람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가>를 규명하는 데 있다.
이제 기억은 마음이나 정신의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뇌생리학이라는 보다 구체적인 과학 탐구의 분야에서 실험의 대상으로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두뇌에 대한 연구는 기원전 1000년 경 남미 페루지방에서 발견된 두개골을 보면 벌써 그 당시 머리에 구멍을 뚫어 악령을 쫓아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뇌생리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독일의 생리학자 갈(1757∼1828)에 의해서다. 갈은 뇌 기관에 대한 조직과 인간의 병에 대한 연관성을 발견하여 27개의 뇌 기관을 정하였다. 이것이 뇌 연구의 시작이 된 골상학이다. 골상학이란, 인간의 지능과 성격을 머리형으로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학문이다.
1861년 프랑스의 의사이며 인류학자인 브로카는 말을 할 수 없게 된 환자의 뇌를 연구하여 두뇌의 왼쪽 대뇌피질이 말을 하는 중추가 됨을 확인하고 브로카 영역이라고 하였다.
1870년 독일의 생리학자 프리찌히는 두뇌의 대뇌피질 중에서 운동을 지배하는 중추와 언어를 인식하는 신경중추의 위치를 밝혀냈다.
1875년 영국의 게이트는 토끼의 뇌파를 측정하여 뇌전도를 기록하였다.
1900년대 미국의 외과 의사 펜필드는 두뇌의 대뇌피질마다 우리 몸을 관장하는 영역이 각각 다름을 발표하였다.
1908년 브로드만은 대뇌피질의 52개 피질령을 구분하여 뇌지도를 작성하였다.
1905년 프랑스의 심리학자 알프레드 비네트에 의해 처음으로 아이큐 검사지가 발간되었다.
1928년 소련의 생리학자 파블로프는 조건 반사학을 발표하였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뇌 연구는 비약적인 발전을 보였다. 이것은 전쟁의 승리를 위한 필사적인 노력으로 개발된 전자 공학의 발달에 힘입어 인간의 대뇌 기능은 광범위하게 그리고 세부적으로 해명되기 시작하였다.
1950년부터 1970년까지 심리학계에는 인간의 마음과 기억, 학습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해야 한다는 패러다임의 일대 전환이 일어났다. 즉 그 이전까지 학계의 주류였던 행동주의 심리학이 퇴조하고 인지주의 심리학이 대세가 되면서 20세기 중반이 넘어서야 겨우 인간의 마음, 기억과 학습에 대해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을 인지혁명이라고 부른다. 이 인지혁명의 새로운 물결은 진화론의 물결과 함께 현대의 시대정신이라고 까지 불리울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인공지능을 비롯한 컴퓨터 과학, 뇌과학, 인지과학 등이 모두 이 인지혁명의 영향권 안에 있는 것들이다.
1970년대 이전까지도 기억술을 훈련한 기억술사들에 대해서 제대로 연구가 되지 않았다. 가령 카드 52장을 1분 내에 모두 외우는 기억술사들을 그 당시 주류 심리학이었던 행동주의 심리학에서는 그저 특별한 (일반인과는 다른, 두뇌기능이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치부했다. 그러니 그들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사고과정과 방법에 대해서는 연구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 것이다.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에게 기억이란 단지 자극을 얼마나 자주 반복하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외적인 행동반응에 불과했다.
1970년대 이후에 인지주의심리학이 대세가 되고 또 뇌과학의 도움을 받아 인간 뇌의 사고과정을 시각적으로 관찰할 수 있게 되면서 인간의 기억에 대한 연구도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그 결과 기억술사들의 경이로운 기억능력이 어떤 선천적인 특별한 능력을 타고났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두뇌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기억방법을 훈련한 결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다.
출처: https://orissam.tistory.com/12687623?category=1292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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